백범일지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김구 선생님의 자서전 <백범일지>를 읽었습니다. 사실 이 책은 몇 년 전에도 한 번 읽은 적이 있는 책인데, 그때는 사실 감명을 받았다기보다는 김구 선생님의 어린 시절 일화에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당시 책을 읽고 독서 토론도 했었지만, 이 책은 내심 제 마음속에 ‘언젠가 한 번쯤 다시 읽어야 할 책’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오늘, 이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다시 읽은 <백범일지>의 감상은 어땠을까요?
백범일지의 줄거리, 내용 확실히 요약해 드리겠습니다.
작가 소개
김구

독립운동가,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김구 선생님의 본명은 김창수이십니다. 일찍부터 가난과 양반의 횡포를 경험하셨던 김구 선생님께서는 동학 운동에 참여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위정척사사상, 의병운동 등에도 참여하셨으며 1905년 체결된 을사늑약 이후에는 항일운동에 매진하십니다.
민족 계몽운동과 함께 항일투쟁을 지속하셨던 선생님께서는 일제에게 자주 체포를 당했고, 잦은 고문을 견뎌야 했지만 끝까지 민족의 자주독립을 꿈꾸셨습니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한 뒤, 김구 선생님께서는 중국 상해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요직을 담당하셨습니다. 한인애국단을 조직해 이봉창, 윤봉길 등의 의거를 지원하기도 하셨습니다.
1945년 광복 이후, 김구 선생님께서는 남북 분단을 우려해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힘쓰셨습니다. 그러나 김구 선생님은 남북협상을 이루어내지 못한 채 1949년 6월 26일 안두희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게 됩니다.
목차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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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과 내 어릴 적
기구한 젊은 때
방랑의 길
민족에 내놓은 몸
3.1 운동의 상해
기적장강만리풍
나의 소원
줄거리 요약
1. 어릴 적 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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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른 밤송이 속에서 붉은 밤 한 개를 얻어서 감추어 둔 것이 태몽이라고 어머님은 늘 말씀하셨다. |
백범 김구 선생님께서는 황해도 해주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의 부모님은 낮이면 농사일을 다니시거나 바다에 고기잡이를 하러 갔습니다. 김구 선생님께서는 어릴 적 자신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십니다.
1) 말썽쟁이

‘친구들에게 놀림받다가 화가 나,
그들을 칼로 죽이려 함’
(이 부분이 제가 몇 년 전 읽었을 때 충격받은 부분이었습니다.)
어릴 적, 김구 선생님은 ‘이 생원 댁’에 자주 가서 그 집 아이들과 어울렸습니다. 그 집 아이들은 언젠가 한 번 김구 선생님을 때렸고, 화난 김구 선생님은 기습적으로 이들을 모두 죽이기 위해.. (조금 무섭습니다.) 큰 식칼을 가지고 이 생원 댁에 갑니다.
다행히도, 이 생원 댁의 18살 된 큰 누나가 그 광경을 쳐다보고 소리를 질러, 김구 선생님은 계획을 실천하지 못합니다.

‘엿이나 떡이 먹고 싶었던 아이’
집 앞에 엿장수나 떡장수가 지나갈 때, 어린 김구 선생님은 유혹을 이기기 힘드셨다고 합니다. 아버지 몰래 숟가락이나 돈을 훔쳐서 간식으로 바꿔 먹으려고 했고, 이 때문에 아버지에게 크게 혼났습니다.
2) 배움의 시작

김구 선생님은 안동 김씨 가문으로 양반 출신이지만, 집안에 벼슬을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당시 한 양반이 이를 빌미로 김구 선생님의 할아버지를 모욕했고, 김구 선생님은 글 공부를 시작하십니다. <통감>, <사략> 등을 즐겨 읽으셨으며, 나름 공부에 재미도 붙이셨습니다.
그러나 과거 대리시험 등 불합리한 현실을 알게 된 후에는 공부에서도 손을 놓습니다.
3) 아기 접주

김구 선생님께서는 동학의 평등사상에 빠져, 접주(동학 무리 중 우두머리 역할을 하는 사람)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수천 명의 지지자를 거느려, ‘아기 접주’라는 별명을 얻습니다.
김구 선생님의 세력은 꽤 안정적이었으나, 당시 접주들 사이에서는 세력 다툼이 있었으며, 크고 잦은 다툼 사이 힘이 약해진 동학당은 정부에게 진압당하게 됩니다. 김구 선생님은 몸을 피해 안 진사(안중근의 아버지입니다.)에게 몸을 의탁합니다.
이때 김구 선생님은 안 진사 댁에 몸을 의탁하고 있었던 다른 식객인 고 선생의 가르침을 받게 됩니다. 고 선생은 김구 선생님께 학문을 가르치십니다. 그는 특히 의리와 대장부의 마음가짐을 강조했습니다.
김구 선생님은 고 선생의 가르침 중 특히 ‘득수반지무족기 현애철수장부아(得樹攀枝不足奇 懸崖撤收丈夫兒)‘, ‘나무를 타고 오르는 것은 기특할 것 없고, 벼랑에서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로다’라는 말에 감명을 받습니다.
2. 치하포 사건
고 선생은 김구에게 청나라에 가서 견문을 넓혀오라고 조언합니다. 김구 선생님께서는 그 말을 받들어 청나라에 다녀옵니다. 다시 안 진사 댁으로 가는 길, 김구 선생님께서는 치하포라는 지역의 한 주막에서 일본인을 마주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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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말이 썩 능숙하지마는 내 눈에는 분명 왜놈이었다. (…) 이는 필시 국모를 죽인 삼포오루(미우라 고로)놈이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그의 일당일 것이요… |
김구 선생님께서는 고 선생의 말을 떠올립니다.
절벽에서 잡은 손을 탁 놓아라, 그것이 대장부다…
김구 선생님께서는 왜놈을 죽여 나라의 수치를 조금이라도 씻기로 결심하십니다. 그는 일본인을 살해하였고, 이후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이 사람을 살해했다는 포고문을 적어놓고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놈을 죽였노라.
해주 백운방 기동 김창수
(*김구의 본 이름은 김창수입니다.)
그로부터 석 달 남짓 후, 김구 선생님은 체포당합니다. 그는 해주 감옥에 갇혔고, 관청의 뜰에서 심문을 받습니다. 살인죄와 도적죄를 묻는 관리들에게 김구 선생님께서는 불호령을 내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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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는 어찌하여 감히 우리 국모 폐하를 살해하였느냐. 내가 살아서는 이 몸을 가지고,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 맹세코 너희 임금을 죽이고, 너희 왜놈들을 씨도 없이 다 없이 해서 우리나라의 치욕을 씻고야 말 것이다.” |
김구 선생님의 쓴소리는 듣는 청중의 가슴을 울렸고, 그의 심문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7월이 거의 다 갈 무렵, 김구 선생님은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그러나 사형일 저녁이 다 되도록, 간수는 김구 선생님을 부르러 오지 않습니다.
어느새 저녁 7시가 넘었고, 문밖에서 “창수, 어디 있소?”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리고 기적 같은 소식이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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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고, 이제는 창수 살았소. (…)대군주 폐하옵께서 대청에서 감리 영감을 불러 계시고, 김창수 사형을 정지하랍신 친칙을 받잡고..“ |
알고 보니 당시 사형을 승인하던 승지 중 한 사람이 김구의 죄명이 ‘국모보수(=국모의 원수를 갚았다.)‘인 것을 이상하게 여겨서, 임금에게 보고했던 것입니다. 당시 왕이었던 고종은 김구의 죄명을 읽고 즉시 어전회의를 열었으며, 김구의 사형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렇게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김구 선생님은 몇 달 후 탈옥을 하십니다.
3. 105인 사건과 백범의 탄생

마곡사
탈옥 후 김구 선생님께서는 마곡사라는 절에 가서 스님이 되기로 하십니다. 그러나 김구 선생님의 아버지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중노릇을 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고, 김구 선생님은 결국 속세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 후 김구 선생님께서는 교육 사업에 전념하십니다. 국민에게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교육을 통해 사람들에게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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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본향 사람들을 모아 놓고 내가 지고 온 환등을 보이면서,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삼천리 강토와 이천만 동포에게 충성을 다하여라.”하고, 목이 터지도록 외쳤다 |
김구 선생님은 신민회(1907년에 조직된 비밀결사단체, 교육과 출판을 통한 애국계몽운동뿐만 아니라 무장투쟁을 위한 국외 독립군 기지 활동도 펼쳤다.)에 가입하시는데, 1911년 신민회의 105인 사건이 터집니다.

끌려가는 애국지사들
* 105인 사건
1911년 조선총독부가 한민족 해방 운동 탄압 목적으로 신민회 회원 105인을 집단으로 체포한 사건입니다.
신민회의 회원이었던 독립운동가 안명근은 서간도에 무관 학교를 설립할 목적으로 자금 모집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인들은 이 일을 날조해, 신민회가 일본 총독인 데라우치를 암살하려는 군자금을 모집하고 있다고 말하며, 관련자들을 모두 잡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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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안명근과 김구가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보았지?” 하는 심문에 대하여 이 소년은, ”나는 안명근이라는 사람은 얼굴도 모르고, 김구는 그 자리에 없었소” 하고,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옆에서 어떤 조선 순사가, “이 미련한 놈아, 안명근도 김구도 그 자리에 있었다고만 하면 너의 아버지를 따라 집에 가게 해 줄 터이니 시키는 대로 대답을 해.” 하는 말에 원형은,”그러면 그렇게 할 터이니 때리지 마셔요.” 하였다. |
일본은 김구 바로 앞에서 증인을 협박하며 김구 선생님과 안명근 사이 연결고리를 만들었고, 김구 선생님께 15년 형을 선고합니다.
김구 선생님과 많은 신민회 조직원들은 수많은 고문을 당합니다. 김구 선생님은 갖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굴복하지 않았고, 오히려 동지들을 위해 울부짖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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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목숨은 너희가 빼앗아도, 나의 정신은 너희가 빼앗지 못하리라” 하고, 소리를 높여 외쳐서 동지들의 마음이 풀어지지 않게 하였다. |

김구 서명본 백범일지
김구 선생님은 1915년에 가석방되시는데, 이때 선생님께서는 자신의 호를 ‘백범‘이라고 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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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범’이라 함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천하다는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 전부가 적어도 나만 한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 하는 내 원을 표하는 것이니, |
4. 끊이지 않는 독립운동
김구 선생님께서는 1919년, 상하이로 망명하셔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립에 참여하십니다. 김구 선생님께서는 임시정부의 문지기 역할을 하고 싶다고 했지만, 그가 하게 된 역할은 경무국장(현 경찰청장)이었습니다.
김구 선생님께서는 친일파, 일본 밀정을 처벌하는 역할을 주도하셨습니다. 이외에도 김구 선생님께서는 1931년에 항일무장투쟁 단체인 한인애국단을 결성하시는데, 여기에서 이봉창, 윤봉길 등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해 내십니다.
1) 이봉창

어느 날 김구 선생님은 사무실에서 이봉창이라는 한 청년을 만나는데 그는,
당신네들은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왜 일본 천황을 안 죽이시오?
라고 묻습니다. 이봉창은 자신이 작년에 천황이 참배하러 가는 행렬을 직접 보며, 폭탄 한 개만 있으면 천황을 죽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김구는 그 말을 관심 있게 듣고 그날 밤, 청년이 묵고 있는 여관에 조용히 찾아갑니다.
이봉창은 일본인의 양아들로 살고 있었으며, 행색도 일본인 같았습니다. 김구 선생님의 동료들은 ‘우리 동포인지 왜놈인지 모를’ 사람을 임시정부 내에 출입시키는 것을 못마땅해했습니다. 그러나 김구 선생님은, 이봉창을 믿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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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평생에 이처럼 신임을 받아본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처음이요, 또 마지막입니다. 과시 선생님이 하시는 일은 영웅의 도량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
이봉창은 김구 선생님의 신뢰에 감복합니다. 그리고 그는 1932년 1월 8일, 일본의 히로히토 천황을 겨냥하여 수류탄을 던집니다. 아쉽게도 그는 일황을 즉사시키지 못했지만 중국 신문은 이 사건을 대서특필합니다.
이봉창이란 한국 사람이 일본 천황을 저격하였으나 ‘불행히’ 맞지 않았다.
2) 윤봉길

어느 날 김구 선생님께 윤봉길이라는 청년이 찾아옵니다. 채소 장사를 하고 있었던 그는, 자신이 상해에 온 이유가 ‘큰일을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김구 선생님은 윤봉길에게 훙커우 공원에서 진행될 일본 천황의 생일에 거사를 치러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고, 윤봉길은 이에 찬성합니다.

그리고 1932년 4월 29일,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은 일본 천황을 향해 폭탄을 던집니다. 이 사건으로 다수의 일본 고위 공직자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윤봉길은 이 사건의 주동자로서 체포된 이후에도 의연한 모습을 보였고, 이는 세계인들을 감동시킵니다. 당시 중국의 통치자였던 장제스는 윤봉길의 의거를 계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게 상당한 금액을 지원하기까지 합니다.
5. 불완전한 독립
임시정부의 활동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임시정부의 관료들은 각기 다른 이념을 주장하며 싸웠고, 많은 갈래의 당파가 생깁니다. 김구 선생님은 이러한 소모적인 당파 싸움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습니다. 또한 외국 세력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주적 독립을 이루고 싶어 했습니다. 김구 선생님은 미국과의 합작을 통해 일본을 공격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왜적이 항복했소!
일제의 이른 항복으로, 한국은 생각보다 이른 해방을 맞이하게 됩니다. 김구 선생님은 대한 독립 소식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 드셨습니다. 일본을 패전시키는 데 임시정부가 기여한 일이 없기 때문에, 국제 간에 발언권이 빈약하리라는 것을 예감하셨기 때문입니다.

김구 선생님께서는 대한민국 자주독립의 날을 기원하며 백범일지를 마무리하십니다. 그러나 김구 선생님의 우려는 그의 사후에 그대로 실현됩니다. 남북은 분단되고, 서로 전쟁을 하며 민족상잔의 비극이 이뤄집니다.
정리
김구 선생님을 기리며
민족의 지도자, 김구는 어떻게 탄생할 수 있었을까요? 그의 특징을 네 가지로 요약해 보겠습니다.
1) 용맹함
동학운동 때 접주 노릇을 하면서부터, 김구 선생님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선봉 역할을 하셨습니다. 치하포 사건에서도 일본인을 죽인 그의 신원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일본의 잦은 고문에도 끝까지 저항하셨습니다.
2) 교육을 중시함
김구 선생님께서는 과거 고 선생으로부터 받은 교육이 아니었다면 자신 역시 ‘대의’를 아는 사람이 되지 못했을 거라고 합니다. 그는 많은 백성들을 교육했고, 애국심을 심어주었습니다.

3) 도량이 넓음
김구 선생님의 신조는 ‘의심하는 사람이거든 쓰지를 말고, 쓰는 사람이거든 의심을 말라’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등용한 인재를 믿었습니다. 그 때문에 이봉창 열사, 안중근 의사 등의 순국 행위가 가능했습니다.
4) 민족의 자주성을 중시함
김구 선생님의 소원은 대한민국의 ‘자주‘ 독립이었습니다. 그는 한국이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기를 바랐습니다.
김구 선생님의 자서전을 보며, 그의 가치관을 엿보니 선생님이 대단하다고 느껴집니다. 그 같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한국이라는 나라가 독립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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